감동이 있는 이야기2

2020년 장기요양보험 체험수기 장려상

오늘처럼 햇볕이 따뜻하고 화창한 날이면 괜히 짜증이 나고 기분이 우울해지곤 했다. 저마다 사람들은 행복하게 웃고 활기찬 일상이었지만 땅이 꺼질 듯한 나의 깊은 한숨 소리만 겉돌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편과 여유롭게 차 한 잔 마시는 것조차 다른 사람들만의 특권인 것처럼 무척 힘든 일이었다.

왜소한 체격에 등까지 굽어 비틀거리는 손이 유난히 작은 시어머니는 평생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하셨다. 품팔이부터 보따리 장사까지 홀로 4남매의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억척스럽게 일만 하며 살아오셨고 이제는 온몸에 골병이 들어 평생 해온 일을 못 하게 됐다. 그 공허함 때문인지, 무료함 때문인지,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예고 없이 울려대는 전화는 노이로제가 돼 나의 일상마저 병들고 지치게 했다.

어머니는 자녀에 대한 애착이 유별난 분이었고 특히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셨다. 주말에 자녀들이 오는 날이면 갈비찜, 두루치기, 수육 등 돼지고기로 만든 반찬들을 올리셨다. 가족들은 이구동성으로 돼지고기라면 이젠 질린다고 말할 정도였지만, 어머니는 빙그레 웃을 뿐 아랑곳하지 않고 더 푸짐하게 준비하셨고 음식을 먹는 자식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곤 하셨다. 그것이 어머니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어릴 적 넉넉하지 못했던 형편으로 고기반찬을 배불리 먹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 것 같다며 남편은 눈시울을 붉혔고 어머니의 이상행동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은 근무 여건상 제때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일이 끝난 후에야 핸드폰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핸드폰 화면을 보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시어머니로부터 여섯 통이 넘는 전화가 와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생겼다는 생각에 와락 겁이 나기 시작했다. 서둘러 전화를 하니 전화를 받지 않으셨고 그날따라 남편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목욕탕에 미끄러졌거나 마당에 나갔다가 현기증이 나 쓰러지는 바람에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에 시어머니 댁으로 가는 내내 피가 마르는 듯했다. 잘해드리지 못한 것들만 자꾸 생각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집에 도착해보니 어머니는 마당 언저리에 털썩 주저앉아 숨이 차다며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숨만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전화도 받지 않고 왜 나와 계시는 거냐고 소리치듯 다그쳤다. 도대체 어머니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냐고 나도 모르게 곁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통곡에 가까웠다.

“애미가 내 걱정을 얼마나 많이 했으면 엉엉 울더라.”
어머니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지만, 먼 객지에서 생신이나 명절이 되면 굽 있는 구두에 예쁜 옷을 입고 검은 차에서 내리는 형님들이 부러웠고 가까이 살면서 언제나 운동화에 딸아이가 입던 유행 지난 점퍼 하나를 걸치고 혼비백산이 돼 달려가는 대기조가 돼버린 나의 신세가 처량하고 서럽기까지 했다. 이 같은 일은 여러 번 반복됐고 가장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우리 부부는 어머니의 전화 소리에 시달리며 댁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장기요양보험 제도에 대한 홍보물을 보게 됐고 사진을 찍어 저녁에 퇴근한 남편에게 장기요양의 도움을 받아보자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남편의 반응은 싸늘하고 차가웠다. “왜? 어머니가 귀찮은 거야? 그렇게 되면 그동안 효도라고 했던 것들은 다 물거품이 되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남편은 밥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저녁을 물린 나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된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졌다. 남편의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주중에는 물론이고 주말마다 반찬이며 국을 한 솥 끓여 날랐고 어머니 댁에 가는 날에는 밀린 빨래며 쾌쾌한 욕실 청소며 텃밭의 일거리를 도왔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우리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자기 바빴다. 바쁘고 힘에 부치는 일상이 계속됐고 기계적인 일상의 노예가 돼 삶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에 대한 안내장이 어머니 댁 우편함에 꽂혀있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공단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동안 효도라고 믿고 해왔던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거라는 남편의 말이 떠올라서인지 선뜻, 문을 열고 들어설 수가 없었다. 문 앞을 서성이는 내게 직원분은 친절하게 어떻게 왔는지 물었고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정신없이 늘어놓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얼마나 지루하고 귀찮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지만, 공단 직원은 따뜻한 차를 대접해주며 하소연을 끝까지 들어줬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서류 작성을 도와줬다. 유일하게 내 편이 돼 많이 힘드셨겠다며 나를 위로해준 직원 덕분에 그동안의 지치고 서럽던 마음들이 눈 녹듯 녹아내리는 듯했다.
며칠 뒤, 공단 직원이 어머님 댁으로 찾아왔고 핸드폰 문자로 의사소견서 제출 안내도 해줬다. 얼마 후, 등급판정결과지를 받기 위해 공단에 가서 보호자 신분증을 제시하니 장기요양인정서라며 봉투를 건네줬다. 도움을 원할 때 언제든지 인정서를 가지고 장기요양기관에 방문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상세한 안내와 우리 지역의 장기요양기관 연락처를 참고하라며 자료까지 챙겨줬다. 무엇하나 대충 이뤄지는 일이 없었다. 인정서 봉투를 들고 90도로 몇 번이나 인사를 했는지 모른다. 남편에게 소식을 알렸더니 남편은 시큰둥했고 어머니에게는 아예 알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봉투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상시와 다름없이 밑반찬과 국을 한 솥 끓여 어머님 댁으로 갔다. 다리가 아픈 어머니는 텃밭에 주저앉아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소변까지 보시는 바람에 젖은 바지가 흙으로 범벅이 된 채 한참을 꼼짝하지 못하셨다고 했다. 인근을 지나던 차가 어머니를 발견하고 집까지 모시고 와서 목욕을 시켜드리고 옷도 갈아입혀 줬고 흙으로 엉망이 된 욕실 청소까지 해주고 간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는 노인들을 도와드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점점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무슨 수를 써야 했다. 수소문 끝에 어머니를 도와준 사람을 찾을 수 있었고 장기요양기관에 근무하는 사회복지사임을 알게 됐다.

며칠 뒤, 어머니와 사회복지사는 서로 한참 이야기를 나눴고 어머니는 사회복지사에게 집에 와서 나 좀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토록 완강히 거부하던 분이었기에 반가움보다 당황스러움이 컸다. 그렇게 어머니는 누구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 방문요양을 원하셨고 드디어 어머니는 장기요양보험 제도의 수급자가 됐다.

요양보호사님은 60대 중반의 나이에 키가 작고 왜소한 체구에 투박하고 작은 손까지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귀가 어두운 어머니였기 때문에 목소리도 크고 어느 정도 덩치가 큰 분이어야 부축을 잘해드릴 텐데 하는 아쉬움과 걱정이 앞섰지만, “친정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볼께유~”하며 수줍게 웃는 요양보호사님을 보며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사회복지사는 어머니의 건강상태에 대해 공단에서 발급해준 표준장기이용계획서를 꼼꼼히 읽어주며 ‘병원 동행과 일방적인 도움보다 잔존기능을 활용해 가능한 스스로 하실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합니다’라고 적혀있다며 자세히 설명해줬다. 요양보호사는 서비스 제공계획서를 바탕으로 급여가 제공되는 시간동안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실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격려해주며 안전한 병원 동행과 규칙적인 식사, 복약 관리를 철저히 해드려야 어머니의 잔존기능이 퇴화되지 않고 더욱 건강해진다고 하셨다.
그리고 퇴근 후 시간에 쫓기면서 수시로 반찬을 해 나르던 내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요양보호사님은 어머니께 당일 식사를 챙겨드리고 어머니가 스스로 끼니를 챙길 수 있도록 다음날 드실 식사 준비까지 해놓고 가셨다. 나는 순간 친정어머니를 떠올렸다. 항상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딸이 안쓰럽고 속상하다며 눈물 흘리던 친정어머니에게 말주변도 없어 고맙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던 게 생각나 울컥했다.

고혈압과 당뇨, 숨이 가쁜 증상으로 인한 합병증이 발생할 때마다 시내병원까지 모시고 가야 했던 일도 요양보호사님이 동행해 다녀오셨고 병원에 다녀온 뒤에는 항상 검사 결과와 의사와의 상담 내용에 대해 알려주셨다. 혹, 추가되거나 변동된 약이 있으면 주말에 다녀가는 자녀들이 혼동하지 않도록 상세히 설명해주셨다. 또한, 낙상예방교육 자료를 보며 여러 번 넘어졌던 적이 있던 어머니가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수시로 교육해주시고 텃밭에는 절대 혼자 가지 마시라며 어머니를 부축해 함께 나가 파를 다듬으셨다. 어머니는 요양보호사님이 주말에 형제들과 베어서 묶어놓은 깨 다발도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며 처마 밑으로 옮겨주셨다며 기쁘게 말씀하셨다.

얼마 전에는 입이 약간 돌아간 것 같아 말씀하실 때 침이 많이 고이고 어눌해지신 것 같다면서 어머니의 상태를 관찰하고 연락을 해왔다. 서둘러, 대학병원으로 가서 검사했고 뇌졸중 초기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빨리 오셔서 다행이라며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사를 하고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어머니는 그토록 좋아하는 집으로 다시 오실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불안과 걱정이 가득하지만 어머니가 수시로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반복해서 교육해주시고 외출을 삼가야 한다며 대리인 자격으로 장기요양인정서와 신분증을 가지고 가셔서 마스크도 사오셨다. 객지에 흩어져 사는 자녀들의 방문을 자제해달라며 전화로 여러 차례 당부하시면서 가족들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어머니가 지내고 있는 일상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내주셨다.

우리 가족에게는 갑자기 나타난 해결사 같았다. 그토록 울려대던 전화 소리도, 나의 통곡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창문 너머로 요양보호사님이 오는 모습을 내다보려고 고개를 길게 내밀고 어머니가 소리치신다. “저기 오네, 저기 와~”

이제는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날에도 짜증나거나 우울하지 않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 대신 활기찬 삶을 살 수 있는 큰 숨이 가슴 속에 꽉 차오르는 것만 같다. 진정한 효도는 누구도 불행하지 않고 가족이 모두 함께 행복한 삶을 사는 가운데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요양보호사님을 딸처럼 의지하고 요양보호사님도 어머니를 친정어머니처럼 살뜰히 보살펴주신다. 또한, 내게도 친정어머니가 돼 인생 상담도 해주시고 요리도 가르쳐주신다. 밥이 맛이 없다던 남편은 퇴근해서 돌아오면 저녁밥을 두 그릇이나 먹는다.

이 모든 것이 참 신기하고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인장기요양보험 덕분이라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된다. 장기요양보험 제도는 어머니는 물론, 우리 가족에게도 감동을 넘어 행복하고 활기찬 새로운 삶을 선물해줬다. 보기만 해도 물리는 돼지고기로 가득한 밥상이 계속될지라도 어머니가 지금처럼만 건강하셔서 가족들이 더욱 우애 있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은 무뚝뚝한 남편의 팔짱을 끼고 신혼 때 자주 갔던 분위기 좋은 찻집으로 차 한잔하러 가고 싶어진다.

자녀분들은 내 부모님이 아프신것을 인정안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나무 같은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보이지 싫으니깐요. 
하지만 그분들은 하루가 다르게 힘들어하십니다. 
자녀를 키울때처럼 우리는 부모님을 돌봐드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옆에 꼭 붙어서는 어느일도 할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럴때는 저희 고은 재가복지센터와 의논해보세요. 
국가자격증 1급을 취득하신 요양보호사분들이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심신의 안정을 드립니다. 
망설이지 마세요. 지금 전화전화하세요. 

고은재가복지센터 010-5778-3256